돈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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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돈비 왕씨는 건륭제의 후궁으로, 1746년 3월 27일에 태어나 1806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1763년 영상재로 입궁하여 영귀인, 돈빈을 거쳐 돈비에 봉해졌다. 궁녀 학대 사건으로 돈빈으로 강등되었으나, 건륭제의 배려로 다시 돈비로 복위되었다. 건륭제의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를 낳았으며, 말년에 건륭제의 문안에 늦어 벌을 받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유릉 비원침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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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비 왕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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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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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왕(汪) (출생 시) |
씨족 | 아이신 교로 (결혼 후) |
출생일 | 건륭 11년 3월 6일 (1746년 3월 27일) |
사망일 | 가경 11년 1월 17일 (1806년 3월 6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
매장지 | 동릉 유릉 |
신분 | |
칭호 변천사 | 영상재 → 영귀인 → 영상재(강등) → 영귀인(복작) → 영상재(재강등) → 영귀인(재복작) → 돈빈 → 돈비 → 돈빈(강등) → 돈비 (복작)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건륭제 (1799년 사망) |
자녀 | 화효고륜공주 |
기타 정보 | |
아버지 | 도통 사격 |
2. 어린 시절 및 입궁
건륭제 11년 3월 6일(1746년 3월 27일)에 태어났다. 왕씨는 정백기 포의 좌령하인 출신이다.
건륭제 11년(1746년 음력 3월 6일, 양력 3월 27일)에 태어났다.[1] 정백기 포의 출신으로, 내무부의 수녀 선발을 통해 궁에 들어왔다.
건륭제 28년(1763년) 10월 13일, 왕씨의 아버지는 딸이 궁중에 들어가 봉사하게 된 것을 황제의 크나큰 은혜라 여기며 사은하는 글을 올렸고, 온 가족이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10월 18일, 왕씨는 내무부의 수녀 선발을 통해 입궁하여 영상재(永常在)에 봉해졌다. 이때 산호조주 한 접시, 금으로 상감한 산호 목걸이 한 개, 금실로 만든 봉황 장식 다섯 개를 하사받았다. 왕씨가 입궁 후 후궁으로서 필요한 교육(내정주위 학칙)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왕씨의 책문에는 '일찍이 덕선(德選)에 응하여 현란(絢爛)한 궁의 예교(禮敎)와 인안유희(仁安維禧)의 인정을 받들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 효성헌황후 아래에서 궁중 여성으로서의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건륭제 33년(1768년) 6월 8일, 영상재(永常在)에서 영귀인(永貴人)으로 진봉되었다. 그러나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재(常在)로 강등되었다가, 건륭제 36년(1771년) 1월 27일에 다시 영귀인(永貴人)으로 진봉되었다. 같은 해 6월 9일에는 영상재(永常在) 신분으로 붉은 꽃이 그려진 이불 한 채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귀인으로 재진봉된 지 5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강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륭제 36년(1771년) 10월 10일, 돈빈(惇嬪)으로 진봉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영귀인(永貴人) 왕씨를 후궁의 봉호로 진봉한다는 내용이 있어, 영상재(永常在)에서 바로 돈빈(惇嬪)이 된 것인지 영귀인(永貴人)에서 돈빈(惇嬪)으로 승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같은 해 11월 28일, 정식으로 돈빈(惇嬪)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3. 후궁 생활
건륭제 28년(1763년) 음력 10월 18일(양력 11월 22일), '''영상재(永常在)'''(제7품 후궁)에 봉해졌다.[1]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궁중에서 봉사하게 된 것을 가문의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언제 건륭제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책문에는 그녀가 덕행으로 황태후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그녀의 품계는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건륭제 33년(1768년) 음력 6월 8일, '''영귀인(永貴人)'''(제6품 후궁)으로 진봉했다.[2] 그러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상재로 강등되었다가, 건륭제 36년(1771년) 음력 1월 27일(양력 3월 13일)[3]에 다시 영귀인으로 복위했다. 같은 해 음력 10월 10일(양력 11월 16일) '''돈빈(惇嬪)'''(제5품 후궁)으로 진봉하여[4] 음력 11월 28일(양력 1772년 1월 2일)에 책봉례가 이루어졌다.
건륭제 39년(1774년) 5월, 건륭제의 피서산장 행행에 동행했으나 임신으로 인해 8월에 먼저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그해 12월(또는 1775년 1월)[5] '''돈비(惇妃)'''(제4품 후궁)로 책봉되었다.
건륭제 40년(1775년) 음력 1월 3일(양력 2월 2일), 황제의 열 번째 딸이자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를 낳았다. 당시 65세였던 건륭제는 만년에 얻은 딸을 매우 총애했으며, 이로 인해 돈비 역시 건륭제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제 43년(1778년), 궁녀를 때려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같은 해 음력 11월 11일(양력 12월 21일) '''돈빈'''으로 강등되었다.[6] 이 사건은 건륭제를 크게 실망시켰으나, 딸인 화효공주를 고려하여 비교적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건륭제 45년(1780년)에 다시 '''돈비'''로 복위되었다.[7]
가경 11년(1806년) 음력 1월 17일(양력 3월 6일)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청동릉의 유릉비원침에 안장되었다.시기 (양력 기준) 품계 비고 1763년 11월 22일[1] 영상재(永常在) 제7품 후궁 1768년 7월 14일[2] 영귀인(永貴人) 제6품 후궁 (음력 6월 8일 진봉) 알 수 없음 영상재(永常在) 강등 1771년 3월 13일[3] 영귀인(永貴人) 복위 (음력 1월 27일 복위) 알 수 없음 영상재(永常在) 강등 1772년 1월 2일[4] 돈빈(惇嬪) 제5품 후궁 (음력 1771년 11월 28일 책봉례) 1774년 12월 또는 1775년 1월[5] 돈비(惇妃) 제4품 후궁 1778년 12월 21일[6] 돈빈(惇嬪) 궁녀 학대 사건으로 강등 (음력 11월 11일) 1779년 12월 또는 1780년 1월[7] 돈비(惇妃) 복위
3. 1. 궁녀 학대 사건과 강등
1778년(건륭 43년), 돈비 왕씨는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궁녀에게 심한 매질을 하도록 명하였고, 이로 인해 궁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건륭제의 큰 분노를 샀다. 청나라의 법에 따르면 궁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씨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으나, 건륭제는 자신이 매우 아끼던 딸 화효공주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건륭제는 1778년 12월 21일, 왕씨를 '돈비'에서 '돈빈'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이와 더불어 사망한 궁녀의 가족에게 은 100냥을 보상하고, 왕씨의 시종들에게 부과된 벌금의 절반을 왕씨가 부담하도록 했으며, 해당 시종들의 급여를 1~2년간 정지시키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건륭제는 사랑하는 딸 화효공주를 생각하여 오래 지나지 않은 1780년(건륭 45년)에 왕씨를 다시 '돈비'의 지위로 복귀시켰다.
3. 2. 돈비 복위와 이후의 사건들
건륭 43년 (1778년), 돈비 왕씨는 사소한 잘못을 한 궁녀에게 심한 매질을 가하도록 명하였고, 이 궁녀는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건륭제는 이 사건에 크게 실망하였으나, 청나라의 법에 따라 왕씨를 처벌할 경우 그녀의 딸인 고륜화효공주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하였다. 결국 건륭제는 같은 해 12월 21일 왕씨를 '''돈빈'''으로 강등시키고, 사망한 궁녀의 가족에게 은 100냥을 보상하도록 명했으며, 왕씨의 시종들에게 부과된 벌금의 절반을 지불하게 하고 급여를 1~2년간 정지시켰다.
건륭 44년 (1779년) 2월 1일, 건륭제는 양심전의 순비 거처를 당시 돈빈이었던 왕씨에게 주고, 왕씨의 거처는 순비에게 주도록 명했다. 또한 명상재는 순비 거처의 차간(次間)에 살게 하고, 원명원 내 용비의 숙소는 왕씨에게, 왕씨의 숙소는 용비에게 주도록 하였다. 순비는 명상재를 데리고 영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건륭 45년 (1780년), 왕씨는 다시 '''돈비'''로 복위되었다.
건륭 46년 (1781년) 2월 3일, 화석화각공주의 큰딸을 궁으로 들여와 익곤궁에 머물게 하였고, 당시 익곤궁의 주인이었던 돈비가 양육을 맡았다.
건륭 49년 (1784년) 1월, 돈비의 삼촌이 전년도 5월에 하녀 정유씨의 남편 정영을 때려 숨지게 하고 유부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같은 해 5월, 돈비의 거처인 익곤궁에서 궁녀 한 명이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금족령 기간 중에 발생한 일이라 총괄태감은 건륭제에게 보고하지 못했다. 그해 10월에는 익곤궁에서 또 다른 관계자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건륭 50년 (1785년) 3월 6일, 돈비의 40세 생일을 맞아 건륭제는 관례에 따라 은 3백냥을 하사했다. 청나라 궁중 관례상 후궁들은 40세부터 생일 축하 예우를 받았으며, 황제의 하사품도 평소보다 많았다. 건륭 60년 (1795년) 3월 6일 돈비의 50세 생일에도 관례에 따라 은 3백냥이 하사되었으나, 이전과 비교하여 생일 대우는 다소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경 원년 (1796년) 11월, 돈비가 태상황이 된 건륭제에게 문안 인사를 늦게 드리자, 건륭제는 "돈비가 문안을 지체하였으니 올해 연례적으로 하사하던 1전(錢) 무게의 은괴 2백 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명했다.
가경 11년 1월 17일 (1806년 3월 6일), 돈비 왕씨는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청동릉 유릉비원침에 안장되었다.
4. 말년
건륭 44년 (1779년) 2월 1일, 건륭제는 태감에게 명하여 돈비와 순비의 거처를 서로 바꾸게 하였다. 이에 따라 돈비는 양심전에 있던 순비의 거처로 옮겼고, 순비는 돈비의 거처로 가게 되었다. 명상재는 순비 거처의 차간(次間, 곁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원명원에서도 용비와 돈비의 숙소를 맞바꾸도록 하였다. 순비는 명상재를 데리고 영수궁에 머물렀다.
건륭 45년 (1780년), 이전에 궁녀 학대 사건으로 인해 돈빈으로 강등되었던 왕씨는 건륭제의 딸 고륜화효공주에 대한 배려로 다시 돈비로 복작(復爵, 작위 회복)되었다.
건륭 46년 (1781년) 2월 3일, 화석화각공주의 장녀를 궁으로 들여와 기르게 되었는데, 당시 익곤궁의 주인이었던 돈비가 이 아이를 맡아 길렀다.
건륭 49년 (1784년)에는 돈비 주변에서 좋지 않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1월에는 돈비의 삼촌이 하녀의 남편 정영을 때려 죽이고 그의 아내를 첩으로 삼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5월에는 돈비의 처소인 익곤궁에서 궁녀 한 명이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10월에는 익곤궁에서 또 다른 사람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세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건륭 50년 (1785년) 3월 6일, 돈비의 40세 생일을 맞아 연회가 열렸다. 건륭제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여 은 3백 냥을 하사하도록 명했다. 청나라 황궁의 관례에 따르면, 내명부의 주위(主位, 비 이상의 후궁)는 40세부터 생일 때 특별한 하사품을 받았으며, 이는 평소 생일보다 훨씬 풍성했다. 평소의 은전 외에도 골동품, 비단, 향료 등이 추가로 주어졌다.
그러나 건륭 60년 (1795년) 3월 6일, 돈비의 50세 생일에는 별도의 축하 행사 없이 관례에 따라 은 3백 냥만 하사되었다. 이는 이전 40세 생일 때와 비교하면 생일 대우가 상당히 축소된 것을 보여준다.
가경 원년 (1796년) 11월, 돈비가 태상황이 된 건륭제에게 문안 인사를 조금 늦게 드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건륭제는 "돈비가 문안을 지체하였으니, 연례적으로 주던 1전 무게의 은괴 2백 개를 올해는 줄 필요가 없다"고 명하여 상을 거두었다.
가경 11년 1월 17일 (1806년 3월 6일), 돈비 왕씨는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청동릉 내 유릉의 비원침(妃園寢)에 안장되었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사이비투 (賽必圖|사이비투중국어) | |
아버지 | 시거 (四格|쓰거중국어) | 정1품 무관 도통(都統) 역임 (1776년 사망) |
오빠 | 바닝아 (巴宁阿|바닝아중국어) | 염정(鹽政) 역임 |
자녀 | 고륜화효공주 (固倫和孝公主|고륜화효공주중국어) | 건륭제의 제10황녀 (1775년 2월 2일 ~ 1823년 10월 13일) 1790년 1월 12일 니오후루 씨족 펑선인더(丰紳殷德|펑선인더중국어; 1775년 ~ 1810년)와 혼인 |
자녀 | 유산 | 1777년 또는 1778년 |
6. 미디어
- 2018년 드라마 여의전에서는 배우 장예가 돈비 왕씨를 연기했다. 당초 배우 주신이 왕부지 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촬영 중 조율되어 해당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았다.
참조
[1]
날짜
乾隆二十八年 十月 十八日
[2]
날짜
乾隆三十三年 六月 八日
[3]
날짜
乾隆三十六年 正月 二十七日
[4]
날짜
乾隆三十六年 十一月 二十八日
[5]
날짜
乾隆三十九年 十一月
[6]
날짜
乾隆四十三年 十一月 三日
[7]
날짜
乾隆四十四年 十一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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